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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존 오브 인터레스트> 영화 리뷰

by 마치버거 2025. 3. 2.
제목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 지역을 뜻한다.

 

1. 줄거리 - 이토록 완벽한 집이 또 있을까요? 

단란한 가족이 살고 있는 반듯하게 잘 꾸며진 어느 주택, 여느 평범한 가족의 일상처럼 평화롭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휘관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그림 같은 집은 매일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벽 너머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단 한 장면도 보여주지 않는다. 벽 너머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비명과 연기만이 밝고 평화로운 일상에 미묘한 음산함을 풍길 뿐이다. 
 
이 영화는 이전의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들과 다르게 학살의 잔혹함이나 전쟁 장면이 없는 독특한 작품이다. 주인공들의 일상 대화와 주변 소음에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은 존(ZONE)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관람자에게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향상을 수상한 작품답게 음향 효과가 뛰어나다. 벽 너무 수용소 소리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다소 건조하지만 잘 정돈된 영상미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관객이 보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 너머의 진실 사이에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게끔 한다.

 


 

2. 평범한 일상이 아닌 악의 평범성

회스 부부는 침대에서 여행 갔던 곳을 회상하며 즐거웠던 한 때를 이야기하거나 잠자기 전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상한 부모이다. 이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보고 있다 보면 벽 너머에 많은 유대인들이 불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기도 한다. 
 
또한 유대인 학살이 실적으로 치부되어 다른 장교와 경쟁을 하듯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모습과 이에 밀려 전근을 가게 되는 장면 등은 평범한 직장인의 고군분투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악의 '평범성’ 또는 ‘진부함’ (The 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은 한나아렌트가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며 느꼈던 바를 책으로 엮어 개념화한 것이다.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주관했던 만큼 매우 사악하고 악마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아주 친절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공개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그동안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해 그저 자신의 상관이 지시한 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 일관했다. 아이히만과 같은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생각하던 중, 한나 아렌트가 떠올린 개념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과 같은 선한 사람들이 스스로 악한 의도를 품지 않더라도, 당연하고 평범하다고 여기며 행하는 일들 중 무엇인가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그가 자신의 일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따르게 되면  악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생겨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감독은 이러한 의도를 잘 드러내기 위해 다소 건조한 형식을 채택하여 마치 영화가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연출하였다. 
실제 촬영은 집처럼 만들어진 세트에 집 안에 여러 개의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뒤  스태프들은 벽 뒤에 있는 트레일러로 모두 철수했다고 한다. 덕분에 배우들은 정말 자기들끼리 생활하듯이 행동하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 실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장면은 무인 카메라로 촬영했기에 배우들은 언제 자신들의 모습이 촬영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회스 역의 프리에델은

단순히 카메라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촬영 내내 우리를 보는 눈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촬영장에는 엄청나게 무거운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 세대의 과오에 대해 책임진다는 의미가
절로 느껴졌다고 가끔은 우리가 거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수용소 바로 옆에서, 과거의 망령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지금 수용소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돼.
이 사람들이 이런 짓을 했다’며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고 한다.



 

3.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출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어느 소녀의 행적과 현재 아우슈비츠의 모습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출 중에 하나는 영화 중간 한 소녀의 행적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부분이다. 이 소녀는 밤마다 채석장처럼 보이는 유대인 노역 장소에 몰래 과일을 가져다 놓는다. (실제 폴란드 여성의 경험담이라고 한다. 당시 아우슈비츠 근처에서 거주하던 10대 소녀가 유대인들을 위해 밤마다 과일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회스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촬영한 기법과  달리 소녀의 행적은 어두 컴컴한 화면에서 단지 열에 의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강렬한 대비는 음향을 통해 영화 내내 고통스러운 역사를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관객에게 숨통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 말미에는 회스 대령이 건물 계단을 내려가다 헛구역질을 하고 컴컴한 복도 끝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화면이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큰 혼란을 준다. 영화를 보고 있던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이 영화가 아니었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감독의 이러한 연출은 마치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영화적 카타르시스에 가두려하지 않으려 찬물을 끼얹듯 보고있는 관객에게 홀로코스트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4. 개요 및 총평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 (Jonathan Glazer)
출연: 크리스티안 프리델, 산드라 휠러 외
장르: 드라마, 역사, 전쟁
개봉: 2023년
상영시간 : 105분
상영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국내외 평론계 모두 호평, 평론가 이동진의 2024년 두 번째 만점작이자  특히 짜기로 유명한 박평식의 역대 열한 번째 9점 작이다.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꼭 보셨으면 합니다.